"로버트김 후원회 너무 유명해져 해산"
[조선일보 2004-09-04 09:22]

후원회장 이웅진씨 "더하면 추해져"

[조선일보 박영철 기자] 지난 1996년 미국의 국가기밀을 한국에 넘겨준 혐의로 7년반의 수감생활을 한 로버트 김(64·한국명 김채곤)을 돕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온 로버트김 후원회가 출범 1년1개월여인 지난달 31일 해산했다.

이제는 전(前) 로버트김 후원회장이 된 이웅진(39) ㈜선우 사장을 지난 1일 만나서 그동안의 얘기를 들어봤다. 전날 해산식에서 통음(痛飮)했다는 그는 밝은 표정으로 1시간40분간 진행된 인터뷰에 응했다.

이 전 회장은 “국민이 전폭적인 성원을 보내주신 덕분에 로버트 김 사건이 잘 마무리지어졌다”며 “로버트 김 후원 활동을 하면서 우리 국민은 냄비민족이 아니고 뭐든지 할 수 있는 민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해산식이 어제(지난달 31일) 오전 11시 리베라호텔에서 열렸죠. 그동안 고생했다며 술 권하는 분들이 많았다고 들었는데요.

“폭탄주 7잔 주량인데 20잔을 마셨어요.(“이거 써도 됩니까?” 하고 묻자 “예 상관없어요”라고 대답.) 잊고 싶었어요. 너무나 공허했고.”

-로버트 김 후원회장을 하면서 어떤 목표를 세우고 일하셨나요?

“작년 7월27일부터 올해 8월31일까지 후원회장 1년1개월 하면서 3가지 목표를 세웠어요. 첫째, 로버트김의 정신적인 한(恨)을 풀어주자. 둘째,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해결하자. 셋째, 실질적인 도움을 주자.

이 세가지 목표를 달성해서 기쁩니다. 첫번째 목표는 로버트 김이 출소했을 때 조국을 이해한다고 말한 것으로 달성됐다고 봐요. 두번째 목표는 2003년 이전에 로버트 김 사건이 스파이라는 흥미 위주로 접근된 면이 있는데 그것을 깨고 로버트 김의 객관적이고 인간적인 모습, 의지, 진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성공했어요. 세번째 목표는 로버트 김에게 작은 집과, 이 사건이 없었으면 20년간 받았을 연금의 40% 수준을 모으는 것이었는데 이것 역시 가능할 것 같아요.

1998년부터 로버트 김과 편지교환하면서 40여 통을 받았어요. 후원회 시작 후 부인인 장영희 여사와 매일 하루 한 통씩 통화를 했고 최근 3~4개월은 하루에 두 번씩 했어요. 장 여사와 신뢰를 쌓는 데 주력했죠. 장 여사님이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선물을 주신 게 있는데요, 노트 100쪽 성경의 좋은 구절을 자필로 다 써가지고 채워서 올 2월에 보내주셨어요. 가족하고 저 하고 인간적인 신뢰를 만들었어요.”


-해산식 분위기 좀 전해주시죠.

“쫑파티는 안 하려고 했어요. 조용히 해산하려고 했는데 몇이서 하자고 했습니다. 20~30명 쯤 올 것으로 생각했는데 68명이 오셨어요. 평범한 직장인들이 와서 소감 얘기해 주시고. 대학교수 한 분이 ‘이렇게 마무리하니까 더더욱 내가 참가하기 잘 한 것 같다’고 말씀하셨어요. 31일 오전 11시 리베라호텔에서 참석자들에게 냉수 한 컵만 주고 한 시간 했고, 식사는 개별적으로 했어요. 그 전에 결산이 끝났으니까.”

-후원회측이 경비를 무척 아껴 썼다고 들었는데요.

“해산식 때 그동안 사용했던 현수막을 20개 전시했어요. 현수막 20개 제작하는 데 4만5000원 밖에 안 들었어요. 나머지는 이사들이 십시일반으로 냈어요. 사람들이 현수막 구겨진 것 보고 열심히 했다는 걸 느꼈다고 했어요.

홈페이지에 결산 내역을 공개했는데 1년1개월동안 인건비는 120만9000원 밖에 안 썼더라고요. 초창기에 간사 한 명을 한달동안 썼는데 월급이 150만원이었어요. 다른 분이 30만원 보태줘서 120만원 나갔고 9000원은 복리후생비로 나갔어요. 커피값, 교통비 등은 회원들이 자비로 충당했고요.

제 회사 직원 2명을 투입해서 인건비는 안 나갔습니다. 국민들이 로버트김 도와주라고 1만원, 2만원 내는 이 비용을 정말 잘 써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랬습니다. 회비는 전액 후원금으로 쓸 수 있도록.

전체 경비가 3000만2000원 되는데요. 발대식 때 초청장 등 만들고 700만원, 자서전 작가 미국 체류비가 250만원, 그 양반이 들어간 교통비는 이사들이 십시일반으로. 신문에 대통령 호소문 광고 낸 게 있어요. 8개 신문 일일이 광고국 찾아가서 읍소해서 6000만원짜리를 2400만원대로 깎고, 이것도 후원회 돈으로는 900만원만 쓰고 나머지는 이사들이 자비부담했어요. 일반 경비만 놓고보면 1년동안 1200만원도 안 되는 거예요.”

-활동을 많이 하셨던데.

“1년간 신문 기사가 500건 이상 나가는 활동을 했는데. 활동을 그만큼 많이 했는데도 돈을 이 정도 지출로 막았으니 잘 한 것 같아요.

(통장을 보여주며)이 안에 눈물이 담겨 있다니까요. 통장 안에 들어오는 돈 5만원, 10만원. 로버트 김 문제는 중산층 이상이 해결한 게 아니고 택시기사에 준하는 사람들이 돈을 모아 분위기를 만들어 해결해 준 건이예요. 우리 이사 여덟 분이 여유가 있는 분들이 아녜요.”

-후원회가 비교적 빨리 해산된 것 아니냐는 얘기를 듣지 않나요.

“후원회를 빨리 해산한 이유는 배가 산으로 갈 가능성도 있고 사회에 부담되는 것을 더 이상 원치 않거든요. 후원회가 유명해져 버렸어요. 저 같은 경우도 후원회장 명함 내밀면 사람들이 다 만나주더라고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김수환 추기경, 조용기 목사, 신기남 열린우리당 전 의장, 한화갑 민주당 대표 등 다 만났어요. 그러니까 이게 함정이 되죠. 잘못하면 배가 산으로 갈 가능성이 높아가지고. 정기국회 하고 연결되는 것도 원하지 않고. 처음에 했던 생각 그대로 온 것 같아요. 좀더 놔둘까 생각도 들었고 고민도 많이 했지만 31일을 앞두고 최근에 해산 보도가 많이 나온 것은 이 때문입니다.

로버트김 후원회장 명함은 기념으로 3장만 남겨놓고 어제(8월31일) 80장 다 찢어버렸습니다. 명함 자체도 사용은 별로 안 했어요. 한번도 후원회장이라는 명함 가지고 사람들 모이는 자리에는 안 갔어요. 로버트김 고향이 부산이고 여수에서 초등학교 나왔는데 8월23일 여수에 있는 분들이 길거리농구하면서 후원금 모을 때 딱 한번 사람 모이는 데 간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예요. 줄 때 계면쩍고. 주로 개별적인 자리에 가서 사람을 만났어요.

몇가지 또 하나 초심(初心)을 지킨 게 어디 가서 사람 얼마든지 모을 수 있었는데 으샤으샤 안 하고 해결했잖아요. 반미나 우익 등 이념적 성향에 치우치지 않고 조용히 합리적으로 해결하려고 고민했습니다.

처음에 고민한 것 중의 하나가 로버트 김 관련한 내용을 어디로 알려야 되느냐? 로버트 김은 정치적인 사안이고 정치부와 연결돼 있지만, 사회부를 선택한 게 그거예요. 기사가 사회부에서 나왔던 게 최초의 선택에서 딱 출발해요. 지금 생각해도 잘 했다고 봐요. 로버트 김 한테 흙탕물 튀길 일은 한번도 안 했으니까.”

-경비를 최대한 아끼셨는데 후원회 사무실은 어땠나요?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쌍봉빌딩의 저희 회사 사무실의 일부를 썼어요. 그래서 임대료는 없었죠. 규모는 3평 정도. 회사 직원 두 명이 상근하고 회원들은 자원봉사자들이 매일 한 명씩 번갈아가며 나왔어요.”

<이때(인터뷰 시작 후 31분 지났을 무렵) 이 전 회장에게 전화가 옴. ‘예. 어어 아냐아냐. 더 이상 나는 얘기하면 안 돼. 로버트 김 관련해서 할 얘기 없어. 그대가 해. 왜왜? 어어. 어디라고? 그래도 나중에 나는 더 이상 연결하면 안 돼. 그러면 추해진다 내가.’>

-회원들은 몇분쯤 됐나요?

“회원들은 실제로 6000명이 넘었지만 몇 개월 단위로 회원들을 정비해서 1500~1600명을 유지했습니다. 대외적으로 인원이 많다고 발표되는 걸 원하지 않았어요. 모순에 빠져요. 회원이 저렇게 많으면 국민에게 호소할 수 있는 명분이 없어져요.

또 하나 좌우지간 저는 옛날에 10대부터 이날 이때까지 봐 왔던 운동에 대한 불신이 많습니다. 나름대로 저는 저렇게는 하지 말아야겠다, 세(勢) 과시라는 거는 창피한 거다. 알고보니까 뛰는 사람은 몇 명 안 되거든요. 실력과 논리로 사회를 설득시켜야 하는데 그런 노력은 안 하고 인원 많아서 그걸로 하게 되는 모습을 많이 봐왔어요. 저는 그러지 말자 생각한 거죠.


정말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는데요 도와주신 돈을 떳떳하게 썼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내주신 분들 한테 이건 제가 해드려야 할 말씀이예요.”



-돈을 아끼려면 속된 말로 몸으로 때우는 노력봉사도 많이 하셨겠네요?

“그걸로 다 했죠 정말. 6월 2일부터 가두모금할 때 식비는 회원들이 자비 부담했으니까. 현수막도 자비 부담했고. 1200만원 중에 가두 모금할 때 앰프 같은 장비가 있거든요. 160만원 정도 됐는데 한달 쓰고 100만원에 다시 팔았어요. 실제로 60만원 밖에 안 되죠.”




-구체적인 추진방식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생각이 다르잖아요. 어떻게 일을 해나가셨나요?

“처음에 한 것은 (조직을) 장악하는 것부터 시작했죠. 안 그러면 배가 산으로 가니까. 제가 후원회장이 되고나서 이사 여덟분에게 사소한 거라도 메일로 계속 보내고 전화 하고 했더니 그분들이 ‘이 회장이 알아서 해라’하라고 허락을 해주시더라구요. 거기서 딱 장악을 했죠. 그 다음에 제가 알아서 했어요. 회장이라는 자리는 소신껏 해야 하거든요. 거의 제 생각대로 90% 이상 진행시킨 거죠. 마지막에 해산할 때는 독선이란 얘기 좀 들었어요. 이사님들 한테 의논하는 절차를 생략했거든요. 먼저 대외적으로 얘기하고 안으로 했어요.

두번째로는 (로버트 김) 가족 하고 신뢰를 쌓고 신뢰가 만들어지고 급하게 해나갔죠.

세번째는 정치적인 내용을 사회·인간적인 걸로 바꿨고. 아마 정치적인 걸로 갔으면 절대 해결 안 되고 진흙탕에 빠졌을 거예요.그러면서 국민들 상대로 하나하나 해나갔습니다.”

-사업을 하셔서 그런지 일하는 요령을 잘 아시나요.

“모르겠어요. 지금도 저는 다른 사람이 했으면 잘 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후원회 해산을 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먹으면서 무엇보다 세가지 약속을 지켰다는 게 참 중요하게 생각됩니다. 제 자신 한테는 절대 욕심 내면 안 된다. 한마디로 다른 길로 가면 안 된다. 국민한테는 이 모임을 순수하게 끝나겠다. 로버트 김을 도와주면 그대로 로버트 김 한테 가게 하겠다. 그리고 이 모임 자체도 로버트 김 돕는 것 이외에는 사용하지 않겠다. 로버트 김과 부인에게는 절대 거짓말하지 않고 흔드는 일을 하지 않겠다. 로버트 김을 돕는 단체로서 소명을 다하겠다. 후원회가 더 남아 있었으면 로버트 김에게 짐이 됐죠. 지금부터는 짐이 되죠. 왜냐하면 도와줬으니까 우리 눈치를 봐야 되고 주객이 전도되는 거예요. 돕는다고 나선 단체가 도움을 받아버리면.”

-초기에 하나씩 하나씩 일을 해나가다 보면 어려움이 적지 않았을텐데요.

“아주 많았어요. 어려운 일이 너무 많아 가지고. 매일매일 그런 일의 연속이어서. 처음에 준비할 때부터 하나도 모르니까 해본 경험이 없고 하다 보니까. 어려움을 다 극복했습니다.

최초의 예를 들면 미국의 담당자 만나고 싶었는데 길이 없었어요. 작년 10월인가 교포를 찾아냈죠. 그 사람이 조언을 주더라고요. ‘찾아간다고 하면 답이 온다”고 해서 로즈 아담스 미국 사면위원장 한테 팩스를 보냈는데 답이 오더라구요. 며칠날 찾아오라고 했어요. 만났는데 저는 그 사람이 그렇게 높은 사람인줄 몰랐어요. 법무부장관 다음이더라구요. 올 2월에 가서 사면위원장을 만나고 왔습니다. 처음에 만나는 게 어려웠지만 만났고.

그 다음에 역시 가장 어려웠던 게 기부금품 모집 허가서를 받는 과정. 개인적으로 가장 큰 영광이었고요. 이게 개인한텐 나올 순 없지만 나왔거든요. 어떻게 보면 국가에서 시인한 거 아녜요? 3월달에 행정자치부에서 나왔을 거예요.

그것 때문에 한승주 주미대사님을 찾아가서 투정했던 기억도 나요. 워싱턴에 가서 ‘어떻게 정부가 이렇게 미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느냐’고 했더니 한승주 대사님이 말없이 눈물을 흘렸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이 건의 가장 기억나는 장면 중의 하나는 공무원들을 접촉하면서 한승주 대사의 눈물일 거예요. 약소국 국민의 서러움을 보여준 거죠. 그래도 그 분이 많이 신경써 주신 것 같아요. 기부금품 모집 허가서를 개인으로 받는 것은 아마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일 거예요. 정부가 저를 신용한 것 아닙니까? 힘들었지만 보람이 되죠 그거 하나는.

그 다음에 700 ARS도 마찬가지고. 결국에 찾아가고 또 찾아가고 안(案)을 내고 하니까 나중에 받았죠. 700 ARS는 7월20일부터 8월30일까지 운영했죠.

또 어려운 게, 로버트 김 문제를 제대로 진상을 알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책이예요. 도서출판을 해야 되는데 이 두 분(로버트 김과 부인)이 겁을 먹어요. 워낙 그 분은 노이로제 비슷한 게 있어요. 누가 감시하지 않는가 하는. 그리고 보호관찰 규정에는 책을 출판하면 인세는 미국 정부에 귀속되게 돼 있어요. 그래서 후원회 이름으로 한 거죠.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 이 책을 통해서 로버트 김 사건의 진상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한 두 마디로는 너무나 짧으니까. 다행히 역사에 기록이 됐죠. 그거 내는 데 그쪽을 설득시키는 게 너무나 힘들었고, 그 분이 겁을 먹고, 변호사도 안 된다 보호관찰….(웃음) 워낙 미국의 보호관찰 규정에 미 해군정보국(ONI) 관련한 해군 근무했던 내용은 얘기하면 안 된다 책을 낼 수 없다. 잘못하면 보호관찰 규정 위반이 되니까 얼마나 겁내시겠어요. 저는 미국이 강대국이니까 강대국이라면 일반 이런 사안을 건드리진 않을 거다 그래서 설사 그렇더라도 더 이상 미국이 간여는 안 할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믿음이 있었고요. 그래서 책을 냈죠. 작년 8월부터 생각하고 12월부터 준비했어요.

작년 8월에 생각하는 건 다 했어요. 이 건을 할 때 얼마 정도 모금한다, 세 가지를 알린다, 세 가지 차원에서 해결한다,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해결한다, 그러면서 성금액 모금은 얼마 정도다. 20년 동안의 생활비와 작은 집을 마련해줘야겠다. 그 집은 우리 교포들의 자존심이니까 좋은 집이어야 한다. 그리고 로버트 김 사건을 알리려면 책이 필요하다 책을 내겠다. 그리고 그러면서 사회접촉이 시작됐고요.

성금 모집 방법에 있어서 참 고민 많이 했죠. 700 ARS를 생각하게 된 것은, 그때 사람들이 많이 돕기는 하지만 모금에 한계가 있겠더라고요. 국민운동을 하려면 촛불시위로 가야 되는데 우리는 적어도 그렇게 하지는 않겠다 절대. 그러니까 다른 방법이 없는가? 해보니까 700이 있더라고요. 700 ARS를 받으려면 기부 금품 모집 허가가 나와야 되고 그래서 기부금품 모집 허가가 필요하게 된 거예요. 작년 9~10월에는 700 ARS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 거죠. 기부 금품 모집 허가만 나오면 되는줄 알았는데 법인이 있어야 하더라고요. 개인이잖아요. 그걸 하다보니까 마지막에 하느님이 도와서 7월20일에 ARS를 하게 된 거예요.




조금씩 조금씩 다 법이 있더라고요. 규정을 활용했습니다. 있는 규정을 다 찾다보니 있더라고요 할 수 있는 방법들이. 예를 들면 비영리법인이더라도 비영리법인에 준하는 사업자등록증 같은 게 있더라고요. 세무사를 찾아가서 자문을 구했죠. 그러니까 700서비스를 받는 과정에서 강남세무서를 찾아갔더니 세무서 공무원들이 좀 유연하더라고요. ‘오 로버트 김이냐? 도와야 된다.’ 원래 사업자등록증 신청하면 1주일 후에 나오는데 ‘있어라’ 하더니 30분만에 내 주더라고요. 받아 가지고 KT에 가져갔죠.(웃음) 고맙죠 뭐.

또 잊혀지지 않는 것으로는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 로버트 김이 출소할 때 참 신기해요. 로버트 김 아버님은 로버트 김이 윈체스터 교도소로 옮긴다는 소식 듣고 목소리 들려드리고 3일 후에 돌아가셨어요. 로버트 김이 가택연금됐다는 소식 듣고 4일 후에 어머님이 돌아가셨어요. 그러니까 어머님이 멀쩡하셨다가 미국시간으로 밤 9시에 로버트 김 하고 통화하고 1시간 후 뇌출혈로 쓰러지셨어요. 그리고 그 다음날 새벽엔가 돌아가셨어요. 기가 막히죠? 그 다음에 사실 가두모금하는 것도 힘들었죠. 생전 밖에 나가 떠들어본 적이 없는데. 날씨도 엄청 더웠죠. 창피하지 아무래도 막 떠든다는 자체가. 도와달라고 막 하는데. 하루에 많을 때 40만~50만원은 꼬박꼬박 했으니까 십몇일은 했으니까 1000만원은 넘은 것 같아요. 장마도 끼여있고 해서 17~18일 밖에 못 했어요. 그래도 하루에 한 시간 정도 했습니다. 그 정도면 많이 한 거죠. 마이크는 30%는 제가 잡고 안의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잡았습니다.

(멘트는 어떤 식으로 했냐 물었더니) ‘조국을 도운 사람을 그 조국이 돕지 않는다면 다음에 조국이 힘들 때 그 누가 나서겠습니까? 정부는 국민을 사랑하고 국민은 정부를 믿는 선례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정부가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로버트 김이 8년만에 나왔지만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럼에도 그는 조국을 사랑한다. 우리는 그런 그를 사랑한다.’
제가 볼 때 후회없이 됐다고 봐요. 국민들 후회없이 도와주셨다. 뭐 아까 행자부나 이런 쪽에서도 배려해 줬으니까 정부도 배려해 줬다고 봐요. 공무원들도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많이 도와줬어요. 만날 때마다 안타깝게 생각을 했고, 만난 실무자들이 개인으로 성금 내주더라고요 10만원씩.(웃음) 주머니 지갑에서 꺼내가지고 성금 주고 ‘너무나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런 얘기 많이 했어요. 그게 좋았어요. 우리는 뭐든지 할 수 있는 민족이고 뭐든지 할 수 있다. 우리 내부의 패배주의, 분열주의, 선입견만 극복하면 좋을 것 같아요. 사실 순수하게 끝나고 싶어요. 다 도와줬다고 보거든요. 우리 모두가 고생해서 만들었어요.

그러면서 매일매일 부딪쳤던 고민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창의력이 필요했거든요. 어떻게 하면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것인가, 어떻게 하면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주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이런 데 대해서 매일매일 고민하는 그 자체가 진짜 힘들었어요. 나는 이 건이 우리 미래 역사로 기록되려면 정부도 당연히 참여하는 가운데 해결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어요. 왜냐 하면 그래야지 자꾸 좋은 선례를 남겨야 하니까. 그리고 또 수고했으면 수고했다고 얘기할 수 있어야 되고.

로버트 김이 미국에 있잖아요. 법에 저촉이 안 되는 범위 내에서 승화를 시킬 것인가? 로버트 김을 어떻게 설득시킬 것인가도 고민이었죠.

가장 또 그때 고민했던 부분 중의 하나는 국민이 관심을 가져주면서 또 한편으로 너무 많이 보도가 되면서 업(業)이 될 수가 있거든요. 그건 본의 아니게 우리가 만든 거죠. 아, 로버트 김 주위사람들이 애국자 논쟁할 때 섭섭했어요. 가까운 사람들이 로버트 김을 너무 애국자로 띄우지 말자고 해요. 그런 게 속상하고.”

-로버트 김 때문에 미국에 사는 교포들은 입장이 곤란하다며 그를 못마땅하게 보는 사람들도 좀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요.

“그 얘기는 내가 꼭 항변을 해야 되는데. 제가 그래서 마지막 3개월 앞두고는 미국에 주는 메시지, 교포에게 주는 메시지가 많았어요. 그런 사람들 한테는 그대들의 얼굴에 백칠을 하라고 하거든요 저는. 로버트 김 때문에 실제로 피해를 본 미국 교포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요. 공직 진출이 안 된 사람 나오라고 그래요. 승진하는 데 잘못된 사람 나오라고 그래요. 없어요.

로버트 김 사건보다 훨씬 큰 사안인 조나산 폴라드 스파이사건 때문에 이스라엘과 미국의 관계가 잘못되거나 악화된 적 없거든요. 그래서 로버트 김은 단순한 스파이가 아니고 분단 현실에서 한국인이라면 누구든지 피할 수 없는 사안이었고 피부가 백색으로 바뀌지 않은 이상 있지 말아야 할 사건이었지만, 일단 발생한 이상 막는 게 필요했거든요.

미국정부 한테는 시간 있을 때마다 그 말 하고 싶은데 왜 한국에서 후원회를 만들어서 움직이냐 로버트 김은 미국시민권자로 미국을 배신한 사람인데 하잖아요. 저는 로버트 김이 미국의 법 어긴 것 인정한다 로버트 김도 인정했다, 그렇지만 한국은 당신들이 6·25 때 5만명 이상이 피를 흘린 자유민주주의를 지킨 보루였다. 매일 북한과의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는 한국인들의 상처, 멍에를 당신들은 알아야 한다. 로버트 김 사건은 여기서 출발하는 거다. 북한 관련한 정보를 미국에 다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보루를 지키는 그 첨단에 서 있다. 5만명의 피를 흘린 장소다. 바로 그런 데서 로버트 김 사건이 발생했고 분단의 철조망에 걸린 사건이고, 한국인이라면 누구든지 빠져나갈 수 없는 이런 멍에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외면할 수 없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 건과 관련해서 분단과 관련해서 발생한 사건에는. 실제 그렇잖아요?

또 하나 그러면 한국교포들이 교포2세나 이런 사람들이, 만약에 중국사람이 한국에 귀화했다 그런 뒤 그 사람이 공직에 있다가 스파이에게 (국가기밀을) 넘겼다 그러면 한국정부는 가만히 있겠느냐 하죠. 그러면 저는 얘기합니다. ‘당연히 엄벌에 처할 거다. 그러나 해당되는 나라가 그 사람을 이용한 나라가 그 사람을 외면한다면 그 민족 자체가 조롱거리가 될 거다. 그 사람을 그러니 책임져야 한다’고요. 만약 그런 걸 소홀히 하면 누가 국가에 충성하겠느냐고 저는 말해요.”

-직원 90명으로 작년에 50억원대의 매출을 올린 중소기업 CEO(최고경영자)이신데 그동안 후원회 일에 전념하느라 본인의 사업에 지장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지난 1년여간 사업에 3을 쏟았다면 로버트 김 사건에는 7을 쏟았습니다. 이제 기업인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서 사업에 전념해야죠. 그동안 직원들이 사장이 좋은 일 한다고 애정을 갖고 잘 밀어준 덕을 봤고, 그동안 내실 있게 운영했던 게 도움이 됐습니다. 사업 손실은 10% 정도 났지만, 제 인생에서는 몇 배 더 이익이예요. 왜? 안목을 길렀거든요. 앞으로 사업을 2배, 4배 성장시킬 수 있는 중요한 자산이 일련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 같아요.

저는 사회관이 이 건을 통해서 긍정적으로 바뀌었어요. 정직하게 정성을 갖고 두드리면 다 열리더라고요. 노력을 하지 않고 편법으로 하려고 하는 게 문제죠. 진솔하게 진실하게 얘기하면 대부분 다 들어주더라. 진실이 통하더라고요. 제가 만나본 사회는 힘들지만 엄격한 룰이 있었고 합리적이었어요.”

-후원회 활동을 하고나서 애국이라는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애국이라는 건 먼 데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사회에 기여한 사람도 애국자고요 그 사람들에게 호감을 표시해주는 그것도 애국이라고 생각해요. ARS에 몇만 명이 돈을 냈는데 그분들 한 분 한 분이 바로 애국자라고 봐요.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가 이어져온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봐요. 우리는 절대 냄비근성이 아니고 냄비민족이 아닙니다. 지난 1년간 온라인통장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전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꾸준히 성금을 보내주고 계속 오고 그랬으니까. 건강한 사례들을 보게 하고 느끼게 하고 하는 게 중요해요. 우리 스스로 부정적으로 보는 습성을 고쳐야 해요.

고구려사나 독도 같은 문제도 정말 우리의 문제라면 5~10년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끈기있게 목표를 만들어가는 그런 모습이 필요한 것 같아요. 일본이 한마디 할 때만 이슈화하지 말고 우리 스스로 계속 자료를 모으고 부단히 만들어가는 거예요. 그렇게 하다보면 우리가 이기죠.

로버트 김 문제는 이제 우리 사회에서 마무리됐다고 생각을 하고 정치권에서도 더 이상 언급이 안 됐으면 좋겠고. 그를 돕는 것은 조용히 살아가면서 교육사업에 헌신하고 싶어 하니까 그쪽으로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로버트 김에게 ‘조국을 사랑한 한국인’이라는 칭호를 달라고 우리 국회에 지난 7월에 청원을 한 상태입니다. 이게 유일하게 남은 과제입니다.”

-로버트 김이 한국에 오나요?

“로버트 김이 영웅으로 더 승화되려면 한국에 온다는 얘길 해야 되는데 그걸 막은 장본인이 저예요. 절대 귀국은 하지 마라. 그의 행복이 뭐냐? 자녀들이 다 거기에 있고 거기서 30년간 살고 있고 64세란 말이예요. 일반사람들이 로버트 김이 진짜 애국자면 한국에 와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데, 후원회는 그의 행복을 위해서 출범한 단체다 와서는 안 된다고 계속 얘기했어요.

대신 9월 중순에 집들이 한번 할 거예요 로버트 김이. 국민들 다 초빙해야 하는데 특별히 워싱턴특파원들만 점심식사 초대하기로 약속했어요. 국민들 한테 사는 모습 보여드려야 하니까. 그때 집 공개하기로 했어요.”

-후원회가 해산되면 앞으로 어떻게 되나요?

“후원회는 해산되고 후견인 동아리만 남습니다. 동아리 세가지 원칙을 만들었어요. 첫째, 정치지향적인 사람은 참여해서는 안 된다. 둘째, 홍보 없이 언론노출 없이 조용하게 해 나간다. 셋째, 로버트 김을 빙자한 다른 모임이 생기지 않도록 한다. 회장은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하고, 저는 회원으로 참가합니다. 동아리는 정회원 12~15명 미만이고 나머지는 예비회원이 되요. 예비회원은 10명 미만으로 하고 정회원이 빠지면 들어오는 거죠.

로버트김 후원회 활동이 시민운동의 바람직한 선례가 된다고 요즘에 주위에서 그런 말씀 많이 해 주셔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동안 인터뷰는 많이 하셨죠?

“처음부터 개인 인터뷰를 자제하겠다는 전략이 있었어요. 로버트 김 문제 해결하는 게 중요했습니다. 실패한 운동을 보면 톱(Top)이 사적인 이익을 위해 이용한다는 거죠.

정말 많이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는데 사감(私感)이 들어가면 안 돼요. 사람들을 설득시키려면 자제하는 게 순서였어요. 저도 대단히 홍보 좋아하는 사람인데 이 건으로는 그럴 수 없었어요. 회장이 자기PR에 열 올린다는 소리 나오는 순간에 저는 상당히 위험해지죠. 그 얘기를 마지막까지 안 들었으니까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잘 끝냈다고 봐요.”

-그러면 오늘은 왜 인터뷰를 하셨나요?

“다 끝났으니까 기록으로 남겨놓는다는 의미에서. 지금까지 로버트 김 후원회장으로서는 제 기억에는 인터뷰를 안 했어요. 로버트 김 관련해서 특별한 일 없으면 아마 이 얘기가 라스트 얘기가 될 것 같아요. 제가 다시는 로버트 김에 대해서 언급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웃음)”

(박영철기자 ycpark@chosun.com )

※인터뷰만으로는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한 탓일까? 이웅진 전 로버트 김 후원회장은 인터뷰가 끝난 뒤 기자에게 이메일을 보내왔다. 전문 그대로 싣는다.

이메일 전문

<관계 설정>

조직, 회사가 아닌 후원단체를 이끌어나가는 데는 나름대로의 어려움이 많다. 우선 회사는 위계질서를 통해 명령과 복종이라는 의사전달 시스템이 있는데, 단체는 그렇지 않다. 회장이든, 회원이든 대등한 관계이다. 말하자면 ‘잠재된 사공들’이 많아 의견이 맞지 않을 때는 쉽게 와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의 도움을 필요로 하므로 그것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그러면서도 지켜야 할 선을 지키면서 호소할 수 있는지도 중요하다. 후원회를 이끌면서 사회와의 관계와 인간관계 등 관계설정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사회와의 관계는 국민, 정부, 정치권과의 관계를 말한다.

*국민들과의 관계

-로버트 김의 현실적인 어려움, 희망, 가족, 미래, 이런 인간적인 모습을 부각시켜 도움을 호소했다. 사건이 알려진지 8년이나 되었고, 아마 국민들 대부분은 막연하게라도 로버트 김이란 이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국민의 관심은 거기까지였다. 이 관심을 실천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관건이었는데, 그 해답을 ‘인간애’에서 찾은 것이다.

*정부와의 관계

-구명위, 석방위, 지금의 후원회에 이르기까지 그 주체는 국민이었다. 국회의원들이 참석하기는 했지만, 그건 정부와는 별개의 개인적인 지원이었다. 정부와 접촉할 때 사무관급의 실무자와 주로 만났다. 이 문제는 높으신 분의 결단도 필요했지만, 우선 로버트 김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그저 정부가 여론에 밀려 도와주어야 한다는 책임감보다는 문제 해결의 필요성을 공감하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실무자와의 대화에 비중을 둔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도 실무자와의 접촉을 통해 정책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고, 무조건 요구하기에 앞서 가능성을 감안하는 등 타협점을 찾고자 노력했다.

*정치권과의 관계

정치, 이념 등에서 중립노선을 지키는 게 후원회 원칙이었다. 협조는 얻되, 개입하지 않는 것이 대정치권 전략이었다. 후원회가 해산 결정을 공지했을 때 게시판에는 이런 글이 하나 올라왔었다. ‘역시 꾼들은 없었다!’는 제목인데, 한국 사회에서 조직의 특성으로 보아 정치적인 성향을 띠거나 활동 영역을 넓히거나 이런 우려가 있었는데, 본래 취지대로 활동하고, 딱 알맞은 시점에서 해산한 것을 좋게 평가하고 있었다.

*인간관계

백동일 대령과의 관계는 고민이 많은 부분이었다. 아다시피 사건의 또 한 당사자이고, 사건으로 인해 인간적인 어려움이 많은 역시 피해자인데, 표면적으로는 가해자랄까, 로버트 김과 대치되는 입장으로 인식되어온 면이 있었다. 하지만 로버트 김은 그가 사건 이후 한직을 전전하다가 강제 예편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왔다. 고민 끝에 백대령을 동료로 포용했고, 우리 바람대로 후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다.

로버트 김의 동생 김성곤의원 또한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그런 도움이 필요하면서도 김의원이 특정정당 소속의 정치인이라는 게 한편으로는 후원활동의 걸림돌이기도 했다. 그건 후원회로서나, 김의원에게는 본의아니게 겪는 어려움이었다. 해산 결정 후 나는 김의원에게 로버트 김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언론에 같이 나오는 것을 자제해달라는 의견을 전했고, 김의원 역시 흔쾌히 내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김원웅 의원에 대해서는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정치인 가운데 정파 관계없이 가장 고마운 분이다. 후원회 행사가 있을 때마다 참석해서 격려해주었고, 직계가족 외에 앨런우드에 면회갔던 사람은 나 말고 김의원 뿐일 것이다. 작년, 노무현 대통령 방미 때에는 로버트 김 문제를 언급해서 아젠더로 다뤄지기도 했다.

<비용부분>

8월 말에 후원회 활동비 지출내역을 공개한 바 있는데, 1년간 인건비가 120만원이라는 걸 보고는 나도 놀랐다. 물론 자원봉사자들의 참여로 후원회가 운영되어 왔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참여하는 것이니만큼 인건비가 들 수 밖에 없는데, 한달 평균 10만원 지출이라는 것은 그만큼 회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의 증거이다. 사무실 임대비용, 각종 운영비 또한 임원진이 자비부담했다. 참 고마운 부분이다.

나 또한 1년 동안 4번 미국에 다녀왔는데, 모두 자비로 충당했고, 출소 때 미국에 다녀온 후원회 간사의 항공료 또한 자비로 부담했다. 그러니까 많은 분들이 보내주신 후원금은 꼭 필요한 행사와 광고에 지출된 것 외에는 대부분 로버트 김을 위해 쓰여진 것이다.

지난 7월에 후원회에서 출간한 ‘집으로 돌아오다’의 경우 로버트 김과 후원회원이 함께 만든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회원들이 각자 자신이 가진 재능을 최대한 활용해서 로버트 김을 돕고 있다. 책을 엮은 김두남 작가도 그렇고, 네티즌들은 넷상에서 카페를 만들어 책을 홍보하고 있고, 사업을 하는 분들은 회사나 개인 홈페이지에 배너 광고를 내주거나 회사 내 모금운동을 하고 있다.

<로버트 김 부부>

지난 5월, 미국에 갔을 때 로버트 김은 아직 연금상태였다. 아침마다 산책을 하는 게 허락된 유일한 외출이었는데, 어느 날, 아침 산책을 함께 나가 로버트 김과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분은 일하고 싶어 하는 의지가 강했고, 잃어버린 시간만큼 더 열심히 살고 싶어했다. 하지만 겉으로 보면 나이도 많고, 전과 경력도 있어 그런 의지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하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사회가 이제는 돕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아무런 편견 없이 그분을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언젠가 장명희 여사는 성경의 잠언서를 일일이 손으로 옮겨 적어 보낸 적이 있다. 노트로 100쪽이 넘는 분량인데, 내가 과연 그런 소중한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정말 감동한 적이 있다. 지금도 그 노트를 보면 두 분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다.

<사람들>

회원 중에는 말 그대로 음지에서 로버트 김을 돕는 분들도 많다. 자신도 어려운 상황인데, 한 푼을 쪼개어 도움을 주는 것이다. 담용 스님의 경우 개인적으로 몸이 불편해서 병원에 자주 다니는데도, 후원회 행사에 늘 참석하시고, 다달이 적지 않은 돈을 송금도 아니고 직접 갖다주신다. 된장 사업을 한다는 어느 분은 후원금으로 낼 돈이 없으니 대신 된장을 줄테니 팔아서 후원금에 보태달라고 하기도 했다. 가두모금을 두 달 가까이 진행했는데, 하루도 안 빠지고 현장에 나오는 두 분의 정성도 감동적이다. 또한 근처의 노숙자 몇 분은 모금 현장을 지켜주어 덕분에 마음 편하게 활동할 수 있었다.

출소 날 국내 행사에는 한성대 교수분이 학생들을 데리고 참석하신 일이 있었다. 강의도 중요하지만, 이런 현장에 직접 와서 배우는 것도 많다는 이유에서이다. 한양대 국제학생회의 경우에는 해외 연수차 워싱턴에 갔을 때 로버트 김을 만났다. 로버트 김은 후배와의 시간을 무척 즐거워했다고 한다.

로버트 김 후원활동은 이렇게 젊은 세대의 공감을 이끌어내 참여의식을 확산시킨 것도 큰 성과 중 하나이다. 흔히 개인적이다, 사회에는 무관심하다는 말을 들어왔던 젊은 세대가 후원회의 중심축이 된 것은 이들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 계기였다.

<후원회 단일화>

후원회 출범 당시 큰 난제는 여러 개로 난립된 후원조직 처리문제였다. 나름대로는 취지를 갖고 활동하는 분들의 뜻을 꺾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그냥 두면 후원활동이 효율적으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결국 로버트 김의 동의를 얻어 미국쪽 후원회를 정리하였고, 이후 지방 등에 후원회가 새롭게 결성될 조짐이 보여 정중하게 말렸던 적도 몇 번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견이 있기는 했지만, 후원회가 단일화되면서 의견 결정과 집행이 순조롭게 이뤄졌다. 이 자리를 빌어 순수한 의도로 로버트 김을 도우려고 했다가 후원회의 권유로 뜻을 접은 분들에게 사과의 말씀드리며, 결국에는 우리 뜻을 이해하고, 도와주신 데 대해 감사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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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파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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